세포만 한 잠수정이 혈관을 돌아다니며 혈전을 제거하고, 마이크로미터(㎛·100만분의 1m) 크기의 잠수정이 인체 내부를 탐험한다. 각각 1960년대와 1980년대 제작된 공상과학(SF) 영화에 나오는 장면이다. 이런 SF 영화 같은 사례가 이제는 현실에서 이뤄지고 있다. 나노미터(㎚·10억분의 1m) 크기를 목표로 ‘자성(磁性) 의학 로봇’이 발전하면서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크기로 작아진 로봇들은 이제 혈관과 뇌, 장기(臟器) 등 접근이 어려웠던 인체 곳곳에 들어가 진단과 치료를 수행한다.
◇뇌, 혈관 등 인체 깊숙이 이동
자성 의학 로봇은 자기장을 이용해 인체 밖에서 조종할 수 있는 작은 크기의 의학 로봇 전반을 일컫는다.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대 연구진은 대동맥에서부터 뇌혈관까지 탐색할 수 있는 나선형 자성 로봇을 개발했다. 이 로봇은 뇌혈관의 폐색으로 뇌 혈류가 감소해 뇌 신경세포가 기능을 못하는 ‘급성 허혈성 뇌졸중’과 같은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뇌에 접근해 문제를 파악할 수 있다.
중국 항저우과학기술대학교 연구진은 혈관 색전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섬유처럼 부드러운 마이크로 로봇을 개발했다. 혈관을 의도적으로 막아 혈액 공급을 줄이는 혈관 색전술은 뇌동맥이나 뇌종양 치료에 임상적으로 널리 사용된다. 기존의 색전술은 혈관을 통해 목표 지점까지 가는 관을 삽입해야 해 환자가 감수해야 할 위험이 컸는데, 마이크로 로봇을 활용하면 관을 삽입하지 않아도 된다.
◇AI 활용해 마이크로 로봇 제어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최홍수 교수 연구팀은 지난 1월 인공지능(AI) 알고리즘을 활용해 마이크로 로봇의 위치를 정밀하게 제어하는 방법을 개발했다고 국제학술지 ‘네이처 머신 인텔리전스’에 발표했다. 기존에는 혈관, 종양 등 목표 위치까지 마이크로 로봇을 보내기 위해 구동자가 복잡한 모델링이나 수학적 계산을 적용해야 했는데, 이를 AI의 강화학습으로 최적화해 자동으로 정밀 제어하는 방법을 내놓은 것이다. 최홍수 교수는 “이번에 개발한 방법이 기존보다 약 50% 빠른 속도로 목표 위치에 수렴했고, 위치 오차도 기존 제어 방식보다 약 40% 적었다”고 했다.
◇바이러스만큼 작은 로봇도 개발
나노미터 크기로 자성 의학 로봇을 만들려는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달 기초과학연구원(IBS)은 “천진우 IBS 나노의학 연구단장(연세대 언더우드 특훈교수) 연구팀이 유전자 신호를 감지해 스스로 움직이는 나노 로봇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고 밝혔다. 세포보다 작은 이 로봇은 지름이 200나노미터에 불과하다. 적혈구(10㎛)의 50분의 1 크기로, 평균적인 바이러스 크기에 해당한다.
이번에 IBS가 개발한 나노 로봇은 반구(半球) 2개를 붙여 놓은 공처럼 생겼다. 위아래 반구가 만나는 부위엔 로터(회전체)가 있고, 로봇 표면에는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다. 로봇 안에는 더 작은 자성 엔진이 들어 있다. 이 엔진은 DNA로 코팅되어 있다. 로봇 표면의 구멍을 통해 바이러스 같은 인자가 내부로 유입되면, 특정 유전자 신호에 반응하는 DNA 가닥이 서로 결합하도록 만들어졌다. 이와 같이 DNA 가닥이 연결되면 로봇의 로터가 회전하면서 움직이는 방식이다.
수동 변속기 차량에서 클러치를 밟고 기어를 바꿔 주행하는 것처럼, DNA 가닥의 결합이 자성 엔진의 동력을 로터로 전달하는 클러치 역할을 하는 셈이다. 연구진이 ‘클러치 나노 로봇’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다.
자성 엔진을 사용하기 때문에 인체 외부에서 자력을 이용해 무선으로 로봇을 제어할 수 있다. 아주 세밀하게 로봇을 움직이면서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연구진은 DNA 클러치에 다양한 질병 인자를 프로그래밍하면, 특정 질병 인자를 감지한 나노 로봇이 세포의 유전자 활성화를 유도하는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IBS는 “바이오 나노 로봇 분야 세계적 권위자인 페어 피셔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교수가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나노 로봇이며, 특히 지능형 나노 로봇 개발에 퀀텀 점프(비약적 도약)를 이룬 연구’라고 평가했다”고 전했다.
천진우 단장은 “세포 수준의 진단과 교정, 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나노 로봇을 활용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